미디어로서의 <소리> — <비(非)소리>
기계적 신체에서 ‘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타나카 미노루 (Curator, Critic)
‘사운드 아트’라고 불리는 장르가 있다. 이는 미술(시각 예술=Visual Art) 영역의 전시(실내든 실외든 작품 단독으로 설치된 상태)라는 형식을 통해 발표되는, ‘소리’를 주요 요소로 삼는 작품을 말한다. 거칠고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듣는 예술’이 주로 음악이라 불리는 것에 반해 사운드 아트는 ‘듣는 행위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미술과 음악 영역에서 파생된 것들이 포함된다.
과거 1960년대에 ‘인터미디어(Intermedia)’라 불린, 여러 장르의 중간 영역에 있는 표현을 전자 기술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 1[주석1]—1960년대 중반, 당시 AT&T 벨 전화연구소 소속 연구원이었던 빌리 클뤼(1927~2004)를 중심으로 화가 로버트 라우션버그, 로버트 휘트먼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뉴욕을 거점으로 미술, 무용, 전자음악, 영상 등 폭넓은 표현 장르를 가로지르며 예술과 기술을 잇는 수많은 실험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40명의 기술자가 참여하여 1966년에 개최한 이벤트 ‘9 Evenings: Theatre and Engineering’, 1968년 브루클린 미술관의 ‘Some More Beginnings’ 전시 기획,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펩시관》등이 있다. 같은 예술가와 엔지니어의 공동체가 있었다. 이들은 바로 미술과 음악, 나아가 무용 같은 장르의 예술가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장하고 서로 교차함으로써, 어느 한쪽에만 속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고자 시도한 것이었다. 사운드 아트에는 이러한 인터미디어나 60년대에 대두된 테크놀로지 아트를 거친 이후의 ‘소리라는 현상’, 그리고 ‘듣는 행위’에 대한 표현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듣는 행위’란 무엇인가.
사운드 아트란 ‘듣는 행위’에 대한 표현이라고 나 역시 대학 강의 등에서 자주 설명하곤 한다. 그때 가장 먼저 예로 드는 것은 (많은 이들이 그렇듯) 존 케이지의 1952년 작 <4분 33초>2[주석2] <4분 33초>는 케이지 본인이 밝혔듯,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1951년 작 <화이트 페인팅>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화이트 페인팅>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고 균일하게 흰색 물감만 칠해진 캔버스를 모듈로 삼아, 여러 개의 캔버스를 조합해 전시하는 연작이다. 주변 공간의 빛의 변화나 우연한 그림자 효과가 흰 화면 위에 고정되지 않는 다양한 사건들을 반영했다.이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설명이 필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요컨대 ‘무음의 음악’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무음’이라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듣는 행위’를 통해 관객에게 의식시키는 작품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4분 33초>에는 악보도 존재하며, 거기에는 연주자를 향해 ‘휴지(TACET, 연주하지 않음)’라는 지시가 적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분명 음악으로 기보되어 있으며, 악보를 읽는 한 ‘무음’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작품이 관객 앞에서 실행되는 순간, 상연되는 장소와 시간에 존재하는 온갖 소리가 작품의 일부로 흡수되어 버린다.
악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음악의 관념적(ideal)인 요소를 실현하는 것이라면, 이 곡은 완전히 침묵으로 채워진 음악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케이지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에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기관인 ‘귀’가 언제나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4분 33초>의 초연은 음악이 작품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듣는 ‘귀’에 의해 매개되고 성립된다는, 지금은 반쯤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을 음악계가 인정한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에피소드와 해석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어느 누구도 이와 유사한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의미에서 <4분 33초>를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게 되었다.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은 케이지가 1951년에 방문한 하버드 대학교 무향실에서의 체험이다. 무향실은 방 전체가 소리의 반사를 흡수하는 소재로 둘러싸여 있다. 그곳에서 완전한 침묵을 체험하려 했던 케이지는 오히려 자신의 몸 안에서 나는 두 가지 소리, 즉 ‘혈액이 흐르는 소리'(낮은 소리)와 ‘신경계가 작동하는 소리'(높은 소리)를 들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침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초연은 1952년 뉴욕에서 데이비드 튜더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본래 <4분 33초>의 초연은 연주가 시작되어 음악이 들려오기를 기대했던 관객들을 배반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일종의 ‘해프닝’ 같은 성격이 강했다. 관객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이 실제로 작품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후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비로소 ‘귀’라는 존재(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를 의식하게 되었다. 연주되지 않음(무음)이 도리어 귀의 기능을 의식하게 만든다는 역설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다양한 정의에 비추어 볼 때, <4분 33초>는 그것이 설령 무음이라 할지라도 음악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 몇 가지를 일단 충족하고 있다. 악보가 있고, 시작과 끝이 있으며, 시간이라는 틀이 존재한다. 다만, 많은 이들이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 믿었던 음악의 구성 요소인 ‘소리’가 부재함으로써 귀의 기능을 자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 음악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다시 상연하여 그 고요함에 그저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운 패러디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작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관객이 아니고서야 본래의 의미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이지 본인도 이 작품의 변주곡들을 만들며 <4분 33초>라는 작품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해 나갔다.3[주석3]—케이지가 ‘듣는 것/들리는 것’과 ‘보는 것/보이는 것'(라우션버그)의 문제를 <4분 33초>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또한 폴 그리피스는 <4분 33초>에 대해 “케이지의 모든 작품과 언제나 동시에 연주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폴 그리피스, 호리우치 히로키 역, 『존 케이지의 음악』 청토사, p.83, 2003년 / 원서는 1981년 Oxford University Press)라고 평했다. 즉, <4분 33초>는 케이지의 작품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듣는 것/들리는 것’을 늘 의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4분 33초>라는 작품은 케이지가 자신의 목이나 안경, 책상에 콘택트 마이크를 장착하고 담배를 피우거나, 물을 마시거나, 글을 쓰는 등의 몸짓에서 나는 소리를 앰프로 크게 증폭시켰던 1962년 작 <4분 33초 제2번 [0분 00초]>처럼, 시간이라는 틀 없이 언제나 열려 있는 귀를 통해 소리를 의식하는 데 더욱 초점을 맞춘 작품들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간다.
사운드 아트라는 분야는 <4분 33초> 이후 ‘듣는 행위’가 작품의 거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인식 위에 서 있다. 나 역시 아주 오랜 기간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렇게 설명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들린다’는 신체적 능력 위에 성립하는, 즉 극히 한정된 상황 속에서의 체험이자 이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리 의식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들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한 표현을 사운드 아트라 불러온 셈이다. 이 구도 안에서는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은 애초에 배제되어 버린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모든 수단은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이들 사이에서 가능해야 하며, 또 열려 있어야 한다. 특히 과거에 케이지가 기대를 걸었던 것처럼, 테크놀로지가 이를 가능케 해 온 공로는 지대하다.
1966년 E.A.T.가 개최한 《9 Evenings: Theatre and Engineering》에서 초연된 <Variation VII>에서는 공연 중에 존재하는, 인간의 가청 범위를 벗어나 들을 수 없는 소리 등을 가청화하여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다. 혹은 소리를 빛으로, 빛을 소리로 변환하는 등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를 넘나들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사운드 아트라는 장르는 ‘들을 수 없음’까지도 포용하면서 ‘듣는 행위’를 업데이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4[주석4]—케이지가 뒤샹처럼 ‘만드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의식을 전환시켰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이 곧바로 사운드 아트를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물론 음악으로 조직화되기 이전의 ‘소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사운드 아트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케이지가 <4분 33초>에서 제기한 문제는 현대음악 중에서도 특히 ‘실험음악’이라 불리는 분야에서 전개되면서 사운드 아트와 연결되는 지점을 갖는다. 또한 케이지 이전에도 ‘듣는 행위’를 통한 인식의 변화로 탄생한 표현으로는 이탈리아 미래주의의 ‘소음 음악’이 있다. 이를 연주하기 위해 1913년에 제작된 소음 악기 <인토나루모리(Intonarumori)>는 우리를 둘러싼 음향 환경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한 귀가 발견해 낸 ‘소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에는 현대미술 분야에서도 ‘듣는 행위’ 그리고 ‘들린다는 것’의 자명성에 대한 의문이나 비판적인 성찰로서, 소리와 음악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스 킴코헨(Seth Kim-Cohen)의 저서 『In the Blink of an Ear: Toward a Non-Cochlear Sonic Art』(Continuum, 2009)에서는 그동안 ‘듣는 행위’에 지나치게 집착해 온 사운드 아트를 비판한다. 청각에 대한 고집에서 벗어남으로써 소리나 음악을 중심 모티프로 삼으면서도 ‘정치, 경제, 사회성, 젠더, 권력’과 같이 소리를 둘러싼 더 넓은 사회적 주제에 기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5[주석5]—’비(非)달팽이관적 음향 예술(Non-Cochlear Sonic Art)’에 대해서는 음악가이자 작곡가, 사운드 아트 연구자인 앨런 라이트(Alan Licht) 씨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는 마르셀 뒤샹이 회화를 두고 ‘오직 눈의 즐거움만을 위해 그려지는, 보는 것에만 치우친 형식’이라며 ‘망막적(retinal)’이라고 비판한 맥락과 닿아 있다. 미술(시각 예술)이 ‘보는 것’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선회하면서, 개념 미술(Conceptual Art)로 이어지는 ‘사고 장치로서의 예술’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사운드 아트가 ‘듣는 것’에 과도하게 치우쳤던 것은 이러한 전환의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귀(달팽이관)’를 통한 ‘듣는 행위(들리는 것)’를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부주의에 대해서는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부산현대미술관(Busan MoCA)의 전시 《몸, 실험 중》이 “휴머노이드 형태에서 ‘또 다른 신체’를 탐구”하고 “신체에 관한” 아트를 표방하는 것과 상통한다. 이 전시는 “‘신체’란 무엇인가라는 경계 자체를 재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운드 아트 역시 마찬가지로 ‘들린다는 것’이 제한된 상황 속의 체험에 불과하다는 전제 위에 서서, 그것이 단지 귀로만 지각되는 감각이 아님을 역설하고,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을 보편적으로 재고하기 위한 장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듣는 행위’에 편중되어 있던 사운드 아트를 다시 포착하고, 그 이면에 있는 ‘들을 수 없음’까지 포함하여 ‘들린다는 것’의 정의를 새롭게 변혁하는 강력한 실험적 측면을 띠게 될 것이다.
물론 본 전시가 사운드 아트를 주제로 한 전시는 아니다. 하지만 기술을 원용하여 소리(또는 시각)를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촉각이나 다양한 데이터 등을 종합한 정보로서 포착하려는 시도의 작품들이 존재한다. 이는 ‘또 다른 신체’로서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실험 음악이란 케이지의 정의를 따르자면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행위”(에 의한 음악)이다. 또한 작곡가 마이클 나이먼은 동시대 유럽 중심의 현대음악과 실험음악을 구분 지으며, 실험음악을 차별화하는 요소로 앞서 언급한 케이지의 정의와 작품 <4분 33초>를 참조점으로 꼽았다. 나이먼에 따르면 이는 “음악의 부정이 아니라, 음악의 편재(어디에나 존재함)를 긍정하는 것”이다.6[주석6]—마이클 나이먼, 『실험음악: 케이지와 그 이후』 (시이나 료스케 역, 수성사, 1992년 / 원서: Experimental Music: Cage and Beyond, Schirmer Books, 1974)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행위”란 작품의 재현성을 포기하고, 작품의 동일성을 결과물로서의 음악이 아닌 ‘행위나 프로세스(과정)’ 자체에서 찾는 것이다. 예컨대 악보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매번 똑같은 결과물로 연주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실험이란 바로 그러한 행위다.
전시 《몸, 실험중》 또한 그러한 콘셉트를 이어받고 있다. 보통 전시회라고 하면 전시된 작품은 이미 완성된 상태이며, 전시 기간 동안 작품의 상태가 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품 교체 등은 예외로 하더라도). 그러나 이 전시에서는 세 명의 예술가가 벌이는 실험이 각자의 전시실(실험실)에서 전시 기간 내내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후니다 킴(Hunida Kim)의 전시 <파인튜닝 트레이닝 룸>에서는 관객이 체험자, 즉 ‘피험자’가 된다. 관객을 단순한 작품 관찰자가 아니라 실험 프로세스 자체의 증인으로 세우는 두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관객에게 눈과 귀를 대신하는 감각 기관(카메라와 센서)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 경험을 선사하는 <파인튜닝되는 신체감각 2.1>에서, 체험자는 작품을 몸에 장착하고 미술관 내부를 이동한다. 돔 형태의 인터페이스로 머리를 감싸 시각과 청각을 대상으로부터 직접적인 대면에서 격리해 버리는 이 장치는, 이전 시도였던 2021년 작 <디코딩되는 랜드스케이프>나 ‘환경 인식 장치’로서의 2019년 작 <데이터 스케이프>를 통해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가 평소 자신의 감각 기관을 통해 주변 환경과 공간을 인지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려는 시도다. 인간의 눈 대신, 자율주행차의 눈 역할을 하는LiDAR(Light Detection And Ranging) 센서를 이용해 공간을 360도 시야로 포착한다. 여기에 주변 공간으로 레이저 펄스를 발사하고 반사되어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함으로써 공간적 위치를 분석한다.
또한 장치를 처음 장착했을 때는 대상을 곧바로 알아볼 수 없고 불분명하며 흐릿한 영상만 보이지만, 눈을 깜빡이는 행위를 반복함에 따라 대상이 점차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소리 역시 입을 벌리고 닫는 동작에 따라 노이즈에 묻혀 있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평소에는 쓰지 않던 몸짓(제스처)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과 처음 마주한 아기에게 세상이란 노이즈로 가득 찬 미지의 혼돈이자 정보의 바다와 같을 것이다. 후니다 킴의 작품은 정보가 인지되는 과정을 재학습하는 것처럼, ‘보는 것/보이는 것’, ‘듣는 것/들리는 것’을 새롭게 포착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아파라투스(apparatus)=‘환경 인식 장치’를 제작함으로써, 저자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따라온 세계와 환경 지각 방식을 눈과 귀라는 감각 기관을 대체하는 테크놀로지 기반의 ‘또 다른 지각 방식’으로 제안한다. 체험자는 곧 작품을 경험하는 주체이자 실험의 피험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전시가 ‘실험중(Under Experiment)’ 상태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우리의 눈과 귀 같은 감각 기관을, 그 감각을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인터페이스와 대체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미디어화된 미래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사회로 이행하는 중이지만, 현시점에서는 장치에 완전히 의존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기관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감각 기관으로서 이 아파라투스(장치)를 사용하고, 테크놀로지 환경 하에서의 새로운 지각을 훈련함으로써 (이것이 후니다 킴의 전시 공간이 ‘트레이닝 룸(Training Room)’인 이유일 것이다), ‘들리는 것’을 ‘보거나’ ‘만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기능해 왔던 시각이나 청각 등의 제반 감각들이 하나로 재통합되는 장치로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로 들리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것일까. 후니다 킴의 작품은 앞서 서술한 ‘듣는 행위’의 새로운 형태와 마찬가지로, 환경을 지각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한다. 그 순간 ‘들린다는 것’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작가 본인이 ‘게임 같은 작품’이라 말하는 <소마 패치 0.5>는 윈치(winch) 형태의 와이어가 연결된 베스트를 입고, 이를 인터페이스 삼아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문자 정보(메시지)를 뒷걸음질 치며 읽어 나가는 작품이다. 대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정보의 가독성은 높아지지만, 문자에 초점이 맞는 영역이 매우 좁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에 멈춰 서 있기가 무척 어렵다. 뒤를 향해 물러나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초점을 맞추어 정보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은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에서 영감을 받아 쓴 저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년) 속의 천사를 연상시킨다. ‘진보’라는 폭풍에 저항하지 못한 채 미래로 휩쓸려 가면서도, 시선은 과거의 폐허를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는 그 천사 말이다.
또 다른 실험실인 권병준의 ‘로봇 사운드 워크숍(Robotic Sound Workshop)’에서는 그가 제작한 수많은 로봇이 전시되어 있으나, 방문 당시 가동 중이지는 않았다. 전시 기간 동안 열리는 워크숍 참가자들에 의해, 2024년에 상연된 로봇 연극 작품 <On the Bird’s Day>에 사용되었던 로봇들이 제작되고 있었다.
다리가 있는 이 로봇은 발바닥에 자석과 솔레노이드(solenoid)가 내장되어 있다. 로봇의 무대가 되는 금속판 재질의 좌대가 발바닥 자석과 솔레노이드의 진동을 증폭시키는 구조다.
네덜란드의 퍼포먼스 특화 전자음악 연구기관인 STEIM(Studio for Electro Instrumental Music)에 재직했던 권병준의 로봇들은 그 독특한 구조와 움직임 덕분에 인간형 로봇(Humanoid)에 대한 비평처럼 다가온다.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그 움직임이 하나의 ‘안무’처럼 느껴지며, 이는 어딘가 백남준이 1964년에 제작한 <로봇 K-456>에 대한 오마주처럼 읽히기도 한다.
권병준은 자신이 제작하는 로봇을 가리켜 “하늘과 땅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이자 신과 인간을 잇는 존재”라며, “그들은 신의 말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말을 신에게 전하는 번역가이자 언어의 발명가”라고 말한다. 이는 중간적 영역의 상호 침투를 시도하는 것이며, 우리의 개별적 감각을 넘어선 기계적 신체에서의 소통 방식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그들의 언어는 향기이고, 문자는 제스처”인 것과 같이, 본래의 형태나 기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달 방식이 존재하고 있다.
メディアとしての〈音〉—〈非音〉
機械的身体における「聴こえる」とはなにか
畠中実(Curator, Critic)
サウンド・アートと呼ばれるジャンルがある。それは、展覧会という、おもに美術(視覚芸術=Visual Art)の領域で、屋内であれ屋外であれ、展示という形式(作品単体が設置された状態)によって発表される音を主たる要素とした作品、ということができる。より粗く大雑把に言ってしまえば、「聴く芸術」がおもに音楽と呼ばれるのに対して、サウンド・アートは「聴くことの芸術」というべきものでもある。それには、美術および音楽の領域から派生したものが含まれる。かつて、1960年代にインターメディアと呼ばれた、諸ジャンルの中間領域における表現を、電子テクノロジーによって実現しようとした、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註1]のようなアーティストとエンジニアの共同体は、まさに美術と音楽、さらには舞踊といったジャンルのアーティストが、それぞれの領域を拡張し、それらが交わることで、それぞれの領域の中間に属する、そのどれでもないような新しいジャンルの創出を試みたものである。サウンド・アートには、そうしたインターメディアや60年代に台頭したテクノロジー・アートを経由した後の、音という現象、そして「聴くこと」についての表現という特徴がある。では「聴くこと」とは何か。
註1——1960年代半ばに、当時AT&Tのベル電話研究所に所属していた技術者ビリー・クルーヴァー(1927~2004)を中心として、画家ロバート・ラウシェンバーグ、ロバート・ホイットマンらによって結成された。ニューヨークを拠点として、美術、ダンス、電子音楽、映像など幅広い表現ジャンルを横断し、アートとテクノロジーを結ぶ数多くの実験を行なう。 代表的なプロジェクトとして、40名もの技術者たちが参加して、1966年に行なわれたイヴェント「9 Evenings──Theater and Engineering」、1968 年のブルックリン美術館における「Some More Beginnings」展の企画、1970年の大阪万博における《ペプシ館》などがある。
サウンド・アートは「聴くこと」についての表現である、と私自身大学の授業などでもよく説明する。その時にいちばん最初に例に挙げるのは(多くの人がそうであるかもしれないが)、ジョン・ケージの1952年の作品《4’33”》 [註2]である。あまりにも有名であるので、説明は不要かもしれないが、つまり「無音の音楽」というものである。と言いつつ、実際には「無音」というような状態がないということを、「聴くこと」を通じて観衆に意識させる作品という方が正しいだろう。《4’33”》には楽譜も存在し、そこには演奏者への「休止」(演奏しない)という指示がある。その意味では、この作品はまぎれもなく音楽として記譜されており、楽譜を読む限り「無音」であるにちがいない。しかし、それが観客の前で実行されるやいなや、その上演される場所と時間に存在した、あまねく音がその作品の一部として取り込まれてしまうというものだ。楽譜というものが、ある意味で音楽のアイデアル(ideal)な要素を実現するものなのだとすれば、それは完全に無音によって構築された音楽で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のだが、作品を構成する要素に、その作品を受容する器官としての「耳」がつねに介在している、とケージは考えた。《4’33”》の初演とは、音楽とは作品それ自体では完結せず、それを聴く「耳」によって媒介され、成立するものであるという、半ばあたりまえのように感じられていることを音楽が認めたという、(あたりまえ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非常にエポックな出来事だったのである。それが、《4’33”》における、その作品を、ほかにだれも同様な作品を作れないという意味で、どこか孤高の作品にした、人口に膾炙したエピソードおよび解釈であろう。
註2——《4’33”》は、ケージ自身が記すように、ロバート・ラウシェンバーグの1951年の作品《ホワイト・ペインティング》から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受けて制作された。《ホワイト・ペインティング》は、一様に白く塗られた、何も描かれていないキャンヴァス(あえて言えば白い塗料が塗られている)をモジュールとして、複数のキャンヴァスを組み合わせて展示されるシリーズ作品。周囲の空間における光の変化や影の偶然の効果が、白い画面の上に固定化されないさまざまな出来事を反映した。
もうひとつのインスピレーションは、ケージが1951年に訪れたハーヴァード大学の無響室での体験である。無響室は部屋全体が音の反響を吸収してしまう素材で囲まれており、そこで完全な沈黙を体験しようとしたケージが、「血液の流れる音」(低い音)と「神経系統の音」(高い音)という身体内からの二種類の音を聴いた、という体験により、「沈黙は存在しない」という認識にいたった。
初演は、1952年にニューヨークでデヴィッド・テュードアによって行なわれた。
そもそも、《4’33”》とは、その初演が、演奏が行なわれ音楽が聞こえてくることを期待した観客を裏切るものであったように、それは結果としてハプニング的な要素が大きいものであった。最終的に観客は、実際には作品を「聴いていた」ことを事後的に知らされることによって、はじめて「耳」の存在(それが正常に機能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意識する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演奏がされない=無音であることが、耳の機能を意識させるという逆説が、そこにはあった。もちろん、さまざまな定義に照らして、それが音楽であることを満たす要件のいくつかを、それがたとえ無音だとしても、《4’33”》はとりあえず持っている。楽譜がある、始まりと終わりがあり、時間という枠がある、しかし、そこに存在すると多くの人が信じていた、音楽を構成する要素であるはずの「音」が存在しないことによって、耳の機能を意識させるという機能をあわせ持った音楽という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それゆえ、以降《4’33”》をふたたび上演し、その静けさにただ耳をすますことは、ただの滑稽なパロディのようなものでしかなくなった。それについての情報をまったく知らない観客にたいしてでないかぎり、本来の意味を果たせないからだ。だから、ケージ自身も、そのヴァリエーションを作り、《4’33”》という作品をアップデートし続けたのである。[註3]
註3——ケージは「聴くこと/聴こえること」と、「見ること/見えること」(ラウシェンバーグ)の問題を《4’33”》の出発点としていることは興味深い。また、ポール・グリフィスが《4’33”》について、「ケージのすべての作品とつねに同時演奏されているものとして理解される必要がある」(ポール・グリフィス 堀内宏公訳『ジョン・ケージの音楽』青土社 p83 2003年 原書は1981年、CAGE, Paul GRIFFITHS, Oxford University Press 1981)というように、《4’33”》は、つまり、ケージの作品にかぎらず、あらゆる時間に適用され、「聴くこと/聴こえること」についてつねに意識することが、意図していないにもかかわらず、意図されることになったとも言える。というように《4’33”》という作品は、ケージが自身の喉や眼鏡、机にコンタクト・マイクを装着し、煙草を吸う、水を飲む、ものを書く、といった所作に伴い発される音がアンプで大音量に増幅される、1962年の《4’33” 第2番[0’00”]》などのように、時間という枠を持たない、つねに開かれている耳によって音を意識することに、よりフォーカスした作品へと、さまざまに変奏されていく。
サウンド・アートという分野は、《4’33”》以後の「聴くこと」が作品の要素として大きな部分を占めている、という認識の上に立っている。そのように私もずいぶん長い間そう考えてきたし、そのように説明してきた。しかし、それは「聴こえること」という身体的な能力の上に成立している、限定的な状況における体験とそれへの限定的な理解にすぎない、ということはあまり意識されてこ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つまり、「聴こえる」ということを前提とした表現がサウンド・アートと呼ばれるという認識である。そこでは、「聴こえない」ということが前提である人々については、あらかじめ除外されてしまうことになる。しかし、もちろん私たちが、日常的にコミュニケーションをとるためのあらゆる手段は、テクノロジーによらなくとも、あらゆる人々との間に可能になっていると言えるし、開かれ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特にケージがかつて期待を寄せていた、テクノロジーがそれを可能にしてきたことは大きい。1966年にE.A.T.によって開催された「9 Evenings──Theater and Engineering」で初演された《Variation VII》では、作品上演中に存在する、人間の可聴域外の聴くことのできない音などを可聴化し作品の中に取り込んだ。あるいは、音を光に、光を音に変換するなど、「聴こえること」と「見えること」の越境を行なおうとした。そうした状況によって、サウンド・アートは、「聴くこと」を「聴こえないこと」を含みながら、アップデートする機会を得たのである。[註4]
註4——ケージが、デュシャンがそうしたように、「つくること」から「聴くこと」へと意識を転換させた、ということはあるだろうが、それが直接サウンド・アートを生んだというわけではない。たしかに、音楽として組織化される以前の「音」が扱われていることにおいて、サウンド・アートとの共通点がある。しかし、ケージが《4’33”》において提起した問題は、現代音楽と呼ばれるジャンルの中でも、特に実験音楽と呼ばれる分野において展開されることで、サウンド・アートと接続される部分を持つ。また、ケージ以前にも「聴くこと」を通じた認識の変化によって生み出された表現としては、イタリアの未来派における「騒音音楽」がある。それを演奏するために1913年に制作された騒音楽器《イントナルモーリ》は、私たちを取り巻く音環境の変化に鋭敏に反応した耳によって発見された「騒音」によって生み出されたものである。
近年では、現代美術の分野から、「聴くこと」そして「聴こえるということ」の自明性にたいする疑いや、批判的な反省としての、音/音楽をモチーフにした作品や、研究が行なわれている。Seth Kim-Cohen による、『In the Blink of an Ear: Toward a Non-Cochlear Sonic Art』(Continuum, 2009)では、これまで「聴くこと」に過度に執着してしまったサウンド・アートを批判し、聴覚への固執から解放することで、音や音楽を中心的なモチーフにしつつも、「政治、経済、社会性、ジェンダー、権力」といった、より広い聴くことをめぐる社会的なテーマに奉仕させることを提案している。[註5]
それは、マルセル・デュシャンが絵画について、目の愉しみのためだけに描かれる、見ることに偏重した形式を「網膜的」であると批判したことを受けている。美術=視覚芸術が「見ること」から「考えること」へと転向したことで、コンセプチュアル・アートへといたる思考装置としての芸術が始まった。一方、サウンド・アートにおける「聴くこと」への偏重は、そうした転換への機会を逸してしまったのだろうか。かならずしもそうではないだろうが、「耳」=「蝸牛」としての「聴くこと」=「聴こえること」を重要視するあまり、それを自明のものとしてしまっていることについての反省はなされるべきだろう。
註5——「Non-Cochlear Sonic Art」については、音楽家、作曲家、サウンド・アート研究者であるAlan Licht氏より教示いただいた。
それは、釜山現代美術館(Busan MoCA)での展覧会『Body, Under Experiment』が、「ヒューマノイド形態における「もうひとつの身体」を探求する」ものであり、「身体についての」アートを標榜する展覧会であるのと同様であろう。そこでは、「「身体」とは何かという境界そのものを再定義するものである」とされている。サウンド・アートも同様に、「聴こえること」がある限定的な状況における体験であるにすぎないという前提に立ち、「聴こえること」とは、たんに耳によってのみ知覚される感覚なのではなく、遍く「聴くこと」と「聴こえること」を再考するための場所を指向するものとなるだろう。それによって「聴くこと」に偏重したサウンド・アートを捉え直し、その表裏の関係にある「聴こえないこと」を含む「聴こえること」の再定義を通して、アップデートするための実験という側面を強く帯びるものとなるだろう。もちろん、本展はサウンド・アートをテーマにした展覧会ではない。しかし、音を(あるいは視覚を)、テクノロジーを援用して、耳のみならず、触覚やさまざまなデータなどを総合した情報としてとらえることを試みる作品もある。「もうひとつの身体」としての知覚のあり方の実験と言えるものだろう。
実験音楽とは、ケージによる定義に従えば「その結果が知られていないような行為」(による音楽)である。また作曲家のマイケル・ナイマンは、同時代のヨーロッパを中心とした現代音楽から実験音楽を区別し、異質なものとする要素として、先のケージによる定義と作品《4’33”》を参照点として挙げている。それは、ナイマンによれば「音楽の否定ではなく、音楽の偏在の肯定」である[註6]。「その結果が知られていないような行為」とは、作品の再現性を放棄し、作品の同一性を、結果としての音楽ではなく、その行為あるいはプロセスに求めるものである。たとえば楽譜は存在するが、それが毎回同じような結果をもたらす演奏になるとは限らない。実験とはそのような行為である。
註6——マイケル・ナイマン『実験音楽 ケージとその後』椎名亮輔訳、水声社、1992年
Experimental Music: Cage and Beyond, Schirmer Books, 1974
展覧会『Body, Under Experiment』もまた、そうしたコンセプトを引き継ぐものだろう。展覧会というものは、通常では展示された作品は完成されたものであり、その作品の状態は会期を通じて変化することはない(展示作品の入れ替えなどはあるにせよ)。ここでは、3人のアーティストによる実験が、それぞれの展示室=実験室で会期中展開されている。フニダ・キムの展示「Fine-Tuning Training Room」では、観客が体験者すなわち被験者となり、たんなる作品の観察者ではなく、実験プロセスそのものの証人としての立場に置かれることになるような2作品が展示されている。観客が目と耳に代わる感覚器官となるカメラやセンサーによって世界を知覚する感覚をもたらす《Fine-Tuning Human Sense 2.1》では、体験者は作品を装着して美術館内を移動する。ドーム型のインターフェースに頭部を覆われて視覚と聴覚を直接対象を見たり聴いたりすることから隔離してしまうこの装置は、先立つ試みである、2021年の作品《Landscape being Decoded》や、「環境認識装置」としての2019年の作品《Datascape》を通じて、継続して探究されてきた方法でもある。周囲の環境や空間を私たちが通常自身の感覚器官によって行なっている方法とは異なる形で、知覚、認識しようとするものである。人間の目ではなく、自動運転車の「目」であるLiDAR(Light Detection And Ranging)センサーによって空間を360°の視野で捉え、さらに周囲の空間にレーザーパルスを発射し、その反射の時間を測定することで、空間的な位置を分析する。また、装着時点では対象を、まさにそのものであると認識できず、不鮮明でおぼろげな映像しか見ることができないが、瞬きを繰り返すことで、対象物は徐々に明瞭に見えるようになり、音も口の開閉の挙動によって、ノイズにうもれた音が鮮明に聴こえるようになってくる。対象を認識するために普段は使わないジェスチャー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初めて世界に対峙した赤ん坊にとって、世界とはノイズに満ちた未知の混沌とした情報の海のようなものである。それが情報として認識されるようになる過程を再学習するかのような、「見ること」「見えること」「聴くこと」「聴こえること」を捉え直すようなことであるかもしれない。
このようなapparatus=「環境認識装置」を制作することで、私たちが慣習的に従ってきた世界、環境を知覚する方法を、目や耳という感覚器官を代替するテクノロジーによる、もうひとつの知覚する方法として提案する。体験者はすなわち、作品を体験する体験者となり、実験の被験者となる。それが、この展覧会が「Under Experiment(実験中)」であること証左となる。それは、私たちの目や耳といった感覚器官を、その感覚器官を拡張するために作られたさまざまなインタフェースと置き換える試みであり、完全にメディア化された未来の人間像とも言える。すでに私たちは、そうした社会に移行しようとしているのだが、現時点では完全に装置に依存することはできず、身体に備わった感覚器官を主として使っている。しかし、もうひとつの感覚器官としてのapparatusを使用し、そうしたテクノロジー環境下での新たな知覚を訓練することで(それが展示の名称が「Training Room」である所以だろう)、「聴こえること」を「見る」こと、あるいは「触る」ことができるような、これまで個別に機能していた視覚や聴覚といった諸感覚が、再統合されるような装置ともなる可能性を持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聴こえない」ことがほんとうに聴こえないことと言えるのだろうか。キムの作品は、これまで述べてきたような、「聴くこと」の新たな形と同様に、環境の新たな知覚の方法を提案するものだろう。その時、「聴こえるということ」の意味は変わっていることだろう。
本人いわく、ゲーム的な作品であるという《Soma Patch 0.5》は、ウインチのようなワイヤーの取り付けられたベストを着て、それをインターフェースとして、ディスプレイに表示される文字情報としてのメッセージを後退りしながら読んでいく。対象との距離をとることで情報が可読性を増すが、文字にフォーカスが合う領域が非常に狭いため、正確な位置に留まっていることがとてもむずかしい。後ろ向きに後退りしながら、しかし、それゆえに焦点を結び、情報に近づくことができる。それは、ドイツの思想家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が、パウル・クレーの絵画『新しい天使』から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受けて『歴史の概念について』(1940年)の中で記した、進歩という嵐に抗うことができず、未来へと吹き飛ばされながら過去の廃墟を見つめ続ける天使のようにも見える。
もうひとつの実験室である、Byungjun Kwonの「Robotic Sound Workshop」では、Kwonが制作したロボットの数々が展示されているが、それらは稼働していなかった。会期中に開催されているワークショップの参加者によって、2024年に上演されたロボット演劇作品《On the Bird’s Day》に使用されたロボットが制作されていた。足を持つそのロボットは、足の裏に磁石やソレノイドが仕込まれている。それが、ロボット自身のステージとなる金属板による台座が、足裏の磁石やソレノイドの振動を増幅する。オランダのパフォーマンスに特化した電子音楽研究機関であるSTEIM(Studio for Electro Instrumental Music)に在籍していたKwonによるロボット群は、そのユニークな構造や挙動によって、それゆえに人間型ロボット(Humanoid)への批評とも感じられる。最低限の人間らしさを保ちながら、その動きが振り付けと感じられるような、またそれはどこかナムジュン・パイクが1964年に制作した《ロボット K-456》のオマージュとも感じられる。
クォンは自身の制作するロボットを、「天と地との間を媒介する存在であり、神と人間をつなぐ存在」であり、「彼らは神の言葉を人間に伝え、人間の言葉を神に伝える翻訳者であり、言語の発明家」でもあると言う。それは、中間的な領域の相互浸透を試みるものであり、私たちの個別の感覚を超えた、機械的身体における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方法である。そこには、「彼らの言語は香りであり、文字はジェスチャーである」ような、もともとの姿や機能とは異なる伝達がある。